사진 출처: 다음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을 ‘성공하지 못한 음악가'라고 느꼈던 마티유 선생과 그를 ‘성공한 음악가’라고 당당히 말했던 퐁드레당의 아이들
영화 ‘코러스’는 어느 늙은 대 지휘자가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거기서 그 대 지휘자는 그 마을의 어느 노인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페피노였다. 그리고 그 둘의 스승이었던 마티유 선생의 사감 시절 모습에 대해 이야기가 전개 된다.
이 모든 건 마티유 선생이 쓴 사감일지에서부터 시작된다. 마티유가 그 시절 그 보육원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페피노는 그 늙은 대 지휘자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그 지휘자에게 사감일지를 건넨다.
마티유 선생이 퐁드레당(최저학교)에 찾아왔던 그 날부터 어쩌면 그 보육원은 변화가 이뤄졌는지 모른다. 마티유 선생은 뭔가 달랐다. 그 보육원의 교장과 다른 선생들과는 분위기가 달랐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달랐다.
교장은 마티유가 아직 적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며 마티유 선생을 몰아붙인다. 하지만 마티유 선생은 그런 교장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끊임없이 ‘작용, 반작용’을 외치며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다른 선생들의 교칙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아이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행동과 그에 따른 자유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깃든 대화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승화시킨 것이 ‘합창단’이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지는 않았지만 ‘합창단’을 통해 아이들을 달래고 아이들과 동화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장의 의해 마티유 선생은 끝까지 아이들을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한 행동은 충분히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교장에 의해 해고당했을 때 문을 걸어 잠그고 마티유 선생을 위해 아이들이 작별 인사를 노래로 하는 장면과 종이비행기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그 장면에서 아이들의 행동은 분명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처음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그 어느 늙은 대 지휘자는 마티유 선생이 음악적으로 기대를 보였던 모향주였다. 모향주는 음악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페피노는 마티유 선생의 의해 보살핌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끝이 났다. 물론 그런 와중에 교장은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아이들의 진술에 의해 그가 그렇게 원했던 ‘별’을 달지도 못하고 사퇴하게 된다.
영화 ‘코러스’는 이런 단편적인 생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위 줄거리도 내 나름대로 정리 한 것이지만 마티유 선생이 왜 ‘코러스’ 즉 합창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
퐁드레당이 최저학교라고 불렸던 이유는 비단 시설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교장으로부터 시작해 수위를 보고 있는 막상스 영감에 이르기 까지 아이들은 그저 체벌과 감금을 통해서만 교육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직자들의 정신상태에서 부터 최저학교라는 말이 걸 맞는 곳이었다.
마티유 선생이 퐁드레당에 도착하자마자 껄끄러움을 느꼈던 그런 권위적인 모습은 바로 이 학교의 곳곳에서 나왔다. 아이들의 생각을 곧잘 무시되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장이 사감으로 온 마티유 선생에게 ‘종이나 쳐’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과연 상상조차 할 수 있는 행동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 점이 교장의 한계라는 생각을 하였다. 교장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에게는 한 없이 강하고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약한 사람이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사자가 있을 때는 한 마리 온순한 ‘개’가 되는 양 행동하지만 사자가 사라지면 그 남은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동물들에게 이빨과 발톱을 사정없이 휘갈기는 하이에나처럼 교장은 행동했다.
마티유 선생에게 합창단을 그만두라고 말했던 교장이 남작 부인이 위로차 방문해 합창단을 감상하는 그날 자신이 합창잔의 모든 걸 준비했노라고 말을 하는 건 하이에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교육자로서 가질 수 있는 행동일까.
교장은 마티유 선생을 해고 시키는 날, ‘누군가는 악인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이 직책이 싫어.’라며 자신의 불만을 짜증내며 마티유에게 내뱉는다. 교장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을 그 스스로 털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교육자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과연 보육원의 교장 직을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사퇴되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마티유 선생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눈으로 보기 때문에 너무 쉬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결코 쉽지가 않다. 르케렉과 모향주 일행이 그의 악보를 훔쳤던 장면에서 과연 나 같으면 그들에게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라면 과연 그처럼 몇 번의 기회를 주면서 아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내게 던져보면 고개를 쉽게 긍정 쪽으로 끄덕일 수 없다.
사실 퐁드레당 보육원은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에 의해 아이들이 더 삐뚫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곳에서 마티유 선생은 권위주의로 아이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권위를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그의 교칙은 퐁드레당의 새로운 권위를 세웠던 진정한 교칙이었다.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것이 ‘권위를 세우는’ 진정한 교사의 모습과 ‘권위주의’를 혼동하는 것이다. 마티유 선생은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 나갔다. 그게 앞서 말한 ‘코러스’ 합창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와중에 모향주의 어머니에 대한 사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사심도 넓은 범위로 본다면 모향주를 믿어주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향주에 대한 관심이 적용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여러 번 생각을 해보아도 이 학생들을 변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내면에 이미 존재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선생들과 교장의 교육방식은 아이들의 ‘희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르케렉이 마티유 선생을 ‘대머리 선생’이라며 놀리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이미 아이들에게는 ‘노래’라는 어떤 정서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티유 선생 이전의 선생들은 그 점을 인정하지 않고, 아이들은 무조건 안 된다고 그 선생들만의 잣대에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는 것에서 문제점은 발생된다.
나는 바로 그 점이 고압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수준을 자신들의 잣대에서 멋대로 평가하는 그들의 모습에 의해 아이들은 많은 좌절을 했다고 생각한다. 페피노가 매주 토요일만 되면 부모님을 기다렸던 이유도 그 보육원 사회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미래가 밝지 않는 곳에서 무슨 건설적인 교육이 나올 수 있을까.
그 점에서 마티유 선생이 교장에게 해고당할 때 ‘여기가 지옥이었어’라고 말한 대사가 아직도 공감이 된다. 그곳은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에게도 지옥인 곳이다. 교류되지 않는 일방적인 의견은 ‘지옥’일 뿐, 교육적 기관이라고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마티유 선생의 교육방침을 처음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따르지 않았던 점에서 저압제를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마티유 선생 역시 여느 선생처럼 자신들에게 ‘작용, 반작용’을 외치며 감금과 협박을 자행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초반 아이들은 마티유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모향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서히 그들은 합창단을 완성해 가는 시점에서 어느새 마티유 선생을 따르게 된다.
물론 5월 어느 날 전학 온 몽당에 한해서는 마티유 선생도 변화를 이끌지 못했지만 교장과는 달리 몽당도 끝까지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교사로서의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고 평가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티유에게 반말을 하고 혐오스런 노래를 했는데도 마티유는 ‘바리톤’이 모자르다면서 몽당이 돌아오길 바랐다.
이 점에서 마티유 선생은 충분히 수도계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의 힘이 교장보다는 못해 교장에 의해 그가 원했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말하는 ‘성공하지 못한’ 음악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음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을 이루었고 결국 쫓겨나지만 아이들에게 분명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긍정적이었다고 믿고 싶다.
이 영화는 몽당에 관해서는, 몽당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그는 그 후로도 경찰서에 자주 드나들고 범죄자가 되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하지만 몽당도 깨닫지 않았을까. 그에게 진심으로 대하려고 했던 마티유 선생의 진정성을 그 역시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페피노와 같이 이끌어 나갔던 음악학교에 어쩌면 몽당이 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만약 몽당이 교장 선생을 비난하면서도 그 교장과 똑같은 세속계의 삶을 추구하여 교장 선생같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몽당의 미래라면 이 영화는 그렇게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결말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몽당이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되는 수도계의 단계로 그가 발자국을 디뎠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학창시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 ‘코러스’는 여러 부분에서 생각을 해보게 하지만 선진의 역할과 후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선진을 누구와 만나냐에 따라 후진이 어떤 태도를 가지냐에 따라 그들의 교감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선진으로 온 자가 교장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아이들을 더 경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티유 선생은 퐁드레당 보육원을 변화시켰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이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그 긍정적인 변화는 아이들을 좀 더 성실한 태도로 변하게 하였고 퐁드레당을 ‘최저’가 아닌 ‘최고’의 학교로 바꿔 놓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선진과 후진에서는 어느 쪽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진과 후진간의 신뢰가 존재할 수 있는 그런 믿을만한 사이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접근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부분에서 마티유 선생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느꼈던 쓸쓸함은 페피노를 포함한 아이들의 작별 인사에서 치유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을 따라 페피노가 같이 가겠다고 간청하는 것에서 그는 교사로서 뿌듯했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그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모향주가 대 지휘자가 되어 돌아왔음을 그가 안다면 그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모향주의 음악적 성공도 마티유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선진의 이끄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후진이 있어야 앎과 삶은 변화가 된다고 믿는다.
그 점을 사퇴한 교장은 과연 깨닫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마티유 선생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어려움이 있는 교육방침이다. 교사가 아이들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교육방침으로 나아가려는 선생님들을 영상으로 보았고, 아일랜드와 핀란드의 교육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또 김연아와 오셔 코치의 예를 들어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만약 내가 교사가 된다면, 아니 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교육을 바라보는 입장은 나의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이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것이 선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후진의 관점이 도덕적인 것에서 벗어날 때는 어느 정도의 개입은 필요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이들의 관점을 이해해주는 교사의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앞으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끝으로 영화 ‘코러스’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많이 닮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권위주의가 아닌 권위있는 선생의 모습으로 다가온 ‘키칭’과 ‘마티유’의 역할을 보며 이 시대의 자신의 직책으로 힘없는 자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 그들은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마무리 짓는다.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을 ‘성공하지 못한 음악가'라고 느꼈던 마티유 선생과 그를 ‘성공한 음악가’라고 당당히 말했던 퐁드레당의 아이들
영화 ‘코러스’는 어느 늙은 대 지휘자가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거기서 그 대 지휘자는 그 마을의 어느 노인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페피노였다. 그리고 그 둘의 스승이었던 마티유 선생의 사감 시절 모습에 대해 이야기가 전개 된다. 이 모든 건 마티유 선생이 쓴 사감일지에서부터 시작된다. 마티유가 그 시절 그 보육원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페피노는 그 늙은 대 지휘자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그 지휘자에게 사감일지를 건넨다.
마티유 선생이 퐁드레당(최저학교)에 찾아왔던 그 날부터 어쩌면 그 보육원은 변화가 이뤄졌는지 모른다. 마티유 선생은 뭔가 달랐다. 그 보육원의 교장과 다른 선생들과는 분위기가 달랐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달랐다.
교장은 마티유가 아직 적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며 마티유 선생을 몰아붙인다. 하지만 마티유 선생은 그런 교장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끊임없이 ‘작용, 반작용’을 외치며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다른 선생들의 교칙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아이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행동과 그에 따른 자유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깃든 대화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승화시킨 것이 ‘합창단’이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지는 않았지만 ‘합창단’을 통해 아이들을 달래고 아이들과 동화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장의 의해 마티유 선생은 끝까지 아이들을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한 행동은 충분히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교장에 의해 해고당했을 때 문을 걸어 잠그고 마티유 선생을 위해 아이들이 작별 인사를 노래로 하는 장면과 종이비행기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그 장면에서 아이들의 행동은 분명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처음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그 어느 늙은 대 지휘자는 마티유 선생이 음악적으로 기대를 보였던 모향주였다. 모향주는 음악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페피노는 마티유 선생의 의해 보살핌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끝이 났다. 물론 그런 와중에 교장은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아이들의 진술에 의해 그가 그렇게 원했던 ‘별’을 달지도 못하고 사퇴하게 된다.
영화 ‘코러스’는 이런 단편적인 생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위 줄거리도 내 나름대로 정리 한 것이지만 마티유 선생이 왜 ‘코러스’ 즉 합창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
퐁드레당이 최저학교라고 불렸던 이유는 비단 시설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교장으로부터 시작해 수위를 보고 있는 막상스 영감에 이르기 까지 아이들은 그저 체벌과 감금을 통해서만 교육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직자들의 정신상태에서 부터 최저학교라는 말이 걸 맞는 곳이었다.
마티유 선생이 퐁드레당에 도착하자마자 껄끄러움을 느꼈던 그런 권위적인 모습은 바로 이 학교의 곳곳에서 나왔다. 아이들의 생각을 곧잘 무시되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장이 사감으로 온 마티유 선생에게 ‘종이나 쳐’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과연 상상조차 할 수 있는 행동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 점이 교장의 한계라는 생각을 하였다. 교장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에게는 한 없이 강하고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약한 사람이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사자가 있을 때는 한 마리 온순한 ‘개’가 되는 양 행동하지만 사자가 사라지면 그 남은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동물들에게 이빨과 발톱을 사정없이 휘갈기는 하이에나처럼 교장은 행동했다.
마티유 선생에게 합창단을 그만두라고 말했던 교장이 남작 부인이 위로차 방문해 합창단을 감상하는 그날 자신이 합창잔의 모든 걸 준비했노라고 말을 하는 건 하이에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교육자로서 가질 수 있는 행동일까.
교장은 마티유 선생을 해고 시키는 날, ‘누군가는 악인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이 직책이 싫어.’라며 자신의 불만을 짜증내며 마티유에게 내뱉는다. 교장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을 그 스스로 털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교육자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과연 보육원의 교장 직을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사퇴되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마티유 선생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눈으로 보기 때문에 너무 쉬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결코 쉽지가 않다. 르케렉과 모향주 일행이 그의 악보를 훔쳤던 장면에서 과연 나 같으면 그들에게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라면 과연 그처럼 몇 번의 기회를 주면서 아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내게 던져보면 고개를 쉽게 긍정 쪽으로 끄덕일 수 없다.
사실 퐁드레당 보육원은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에 의해 아이들이 더 삐뚫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곳에서 마티유 선생은 권위주의로 아이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권위를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그의 교칙은 퐁드레당의 새로운 권위를 세웠던 진정한 교칙이었다.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것이 ‘권위를 세우는’ 진정한 교사의 모습과 ‘권위주의’를 혼동하는 것이다. 마티유 선생은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 나갔다. 그게 앞서 말한 ‘코러스’ 합창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와중에 모향주의 어머니에 대한 사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사심도 넓은 범위로 본다면 모향주를 믿어주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향주에 대한 관심이 적용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여러 번 생각을 해보아도 이 학생들을 변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내면에 이미 존재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선생들과 교장의 교육방식은 아이들의 ‘희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르케렉이 마티유 선생을 ‘대머리 선생’이라며 놀리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이미 아이들에게는 ‘노래’라는 어떤 정서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티유 선생 이전의 선생들은 그 점을 인정하지 않고, 아이들은 무조건 안 된다고 그 선생들만의 잣대에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는 것에서 문제점은 발생된다.
나는 바로 그 점이 고압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수준을 자신들의 잣대에서 멋대로 평가하는 그들의 모습에 의해 아이들은 많은 좌절을 했다고 생각한다. 페피노가 매주 토요일만 되면 부모님을 기다렸던 이유도 그 보육원 사회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미래가 밝지 않는 곳에서 무슨 건설적인 교육이 나올 수 있을까.
그 점에서 마티유 선생이 교장에게 해고당할 때 ‘여기가 지옥이었어’라고 말한 대사가 아직도 공감이 된다. 그곳은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에게도 지옥인 곳이다. 교류되지 않는 일방적인 의견은 ‘지옥’일 뿐, 교육적 기관이라고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마티유 선생의 교육방침을 처음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따르지 않았던 점에서 저압제를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마티유 선생 역시 여느 선생처럼 자신들에게 ‘작용, 반작용’을 외치며 감금과 협박을 자행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초반 아이들은 마티유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모향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서히 그들은 합창단을 완성해 가는 시점에서 어느새 마티유 선생을 따르게 된다.
물론 5월 어느 날 전학 온 몽당에 한해서는 마티유 선생도 변화를 이끌지 못했지만 교장과는 달리 몽당도 끝까지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교사로서의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고 평가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티유에게 반말을 하고 혐오스런 노래를 했는데도 마티유는 ‘바리톤’이 모자르다면서 몽당이 돌아오길 바랐다.
이 점에서 마티유 선생은 충분히 수도계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의 힘이 교장보다는 못해 교장에 의해 그가 원했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말하는 ‘성공하지 못한’ 음악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음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을 이루었고 결국 쫓겨나지만 아이들에게 분명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긍정적이었다고 믿고 싶다.
이 영화는 몽당에 관해서는, 몽당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그는 그 후로도 경찰서에 자주 드나들고 범죄자가 되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하지만 몽당도 깨닫지 않았을까. 그에게 진심으로 대하려고 했던 마티유 선생의 진정성을 그 역시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페피노와 같이 이끌어 나갔던 음악학교에 어쩌면 몽당이 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만약 몽당이 교장 선생을 비난하면서도 그 교장과 똑같은 세속계의 삶을 추구하여 교장 선생같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몽당의 미래라면 이 영화는 그렇게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결말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몽당이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되는 수도계의 단계로 그가 발자국을 디뎠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학창시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 ‘코러스’는 여러 부분에서 생각을 해보게 하지만 선진의 역할과 후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선진을 누구와 만나냐에 따라 후진이 어떤 태도를 가지냐에 따라 그들의 교감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선진으로 온 자가 교장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아이들을 더 경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티유 선생은 퐁드레당 보육원을 변화시켰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이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그 긍정적인 변화는 아이들을 좀 더 성실한 태도로 변하게 하였고 퐁드레당을 ‘최저’가 아닌 ‘최고’의 학교로 바꿔 놓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선진과 후진에서는 어느 쪽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진과 후진간의 신뢰가 존재할 수 있는 그런 믿을만한 사이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접근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부분에서 마티유 선생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느꼈던 쓸쓸함은 페피노를 포함한 아이들의 작별 인사에서 치유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을 따라 페피노가 같이 가겠다고 간청하는 것에서 그는 교사로서 뿌듯했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그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모향주가 대 지휘자가 되어 돌아왔음을 그가 안다면 그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모향주의 음악적 성공도 마티유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선진의 이끄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후진이 있어야 앎과 삶은 변화가 된다고 믿는다.
그 점을 사퇴한 교장은 과연 깨닫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마티유 선생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어려움이 있는 교육방침이다. 교사가 아이들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교육방침으로 나아가려는 선생님들을 영상으로 보았고, 아일랜드와 핀란드의 교육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또 김연아와 오셔 코치의 예를 들어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만약 내가 교사가 된다면, 아니 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교육을 바라보는 입장은 나의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이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것이 선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후진의 관점이 도덕적인 것에서 벗어날 때는 어느 정도의 개입은 필요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이들의 관점을 이해해주는 교사의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앞으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끝으로 영화 ‘코러스’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많이 닮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권위주의가 아닌 권위있는 선생의 모습으로 다가온 ‘키칭’과 ‘마티유’의 역할을 보며 이 시대의 자신의 직책으로 힘없는 자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 그들은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마무리 짓는다.
"이 글은 안양대학교 교육학개론에 제출한 글입니다."




덧글
^^ 2009/10/24 01:15 # 삭제 답글
오늘 이영화 보고 참 감동적이였어요.잘 읽고 갑니다^^
간이역 2009/10/24 19:51 #
네 감사합니다이 영화 정말 좋죠?^^